김윤아‘이것과 그것’
김윤아는 필자의 학구열을 자극하는 하는 몇 안 되는 안무가 중 하나다. 사무엘 베케트를 즐겨 읽고 르네마그리트를 사랑하는, 작품에 철학적 깊이를 담는 안무가. 이번 작품 ‘이것과 그것’에는 인생의 부조리함을 말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 대한 그녀의 해석이 담겼다.
김윤아는 소설의 텍스트를 육성으로 제시하며, 팔다리가 떨어지고 몸통과 머리 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이상한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리미로 머리를 다리는 여자, 냄비를 신고 다니는 여자, 세탁바구니를 뒤집어쓴 여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비정상적 행동들이다. 이곳은 어디이고 그녀들은 누구일까.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까.
여자들은 회색의 턴테이블로 대변되는 ‘섬’에 살고 있고, 이곳에는 이상한 침묵이 흐른다. 어디선가 들어온 외부인이 외국어로 한참을 떠들어대지만, 언어와 비언어를 총동원해 손짓 발짓을 할지언정, 그마저도 완전히 무의미한 침묵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꽉 채우되 소통할 수 없는 침묵의 상태, 김윤아의섬에는 소외감이 자리한다.
그러나 사지를 잃은 소설의 주인공과 달리 여자들에겐 팔다리가 남아있다. 내레이션의 “절망, 고통, 쾌락, 상처…”처럼 인생을 짓누르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리를 높게 쳐든다. 심지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무대에서, 무심하게 툭 둘러놓은 듯한 파스텔톤 의자들(그 외에도 침대, 가로등, 빨래건조대 등)을오브제로 삼아…. 동시에 턴테이블은 천천히 회전한다.
이어지는 배우들의 대사.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발췌한 텍스트다. “어떤 누군가가 자신이 존재하는곳에 머물러 있다는 그 이야기도 대단하지, …(중략)…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아무개는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지, 그 아무개가 보기에, 그의 주변에는, 겉으로 보기에, 겉으로 보기에 말이야, 아무 변화도 없는 거야.”
아무변화도 없는 듯한 우리들의 삶. “어디로 가는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며, 죽어가고, 살아가고, 태어나는” 인생…. 그러나 김윤아는 그 부조리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소리들이, 그것들이 돌아다니다가, 큰 벽을 통과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그 모습들을 똑같이 말할 수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지.”
그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론.
“살갗이 좀 벗겨졌네?” “…통과하다 그랬나봐.”
“살갗이 좀 벗겨졌네?” “…통과하다 그랬나봐.”
“살갗이 좀 벗겨졌네?” “…통과하다 그랬나봐.”
무대가 밝아지고, 살갗이 벗겨진 의자들이 보인다. 이제야 온전히 보이는 그 표면들… 하이힐을 신은의자, 대못이 잔뜩 박힌 의자, 가로등에 걸린 의자…. 그렇다, 이곳의 모든 사물은 나다, 살갗이 벗겨진나, 계속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아도 실은 큰 벽을 통과한 나. 사물의 비유를 통해 김윤아는, 피부가 벗겨지도록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고, 매순간 큰 벽을 지나가고 있다고 모든 인생에 위로를 건넨다.
핸드백의 무게에 짓눌러 단체로 종종대는 출근길, 가방은 무겁고, 삶은 더 버겁다. 그러나 끌어안은 가방이 엄마 품의 아기로 변하는 순간, 그렇게 또 한 번, 그녀들은 인생의 큰 벽을 넘고, 살갗이 벗겨지고, 버거움에 가방을 떨구고야 말더라도, 발목에 걸고 질질 끌고라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사무엘은 글쓰기를 형벌이라 여겼지만, 김윤아에게 춤은 위로이자 격려이다. 어쩌면 우리의 존재는 무의미하고, 의사소통은 불가능하고, 의지는 무력하지만, 사무엘이 말하듯 ‘침묵이 있을 것이고’,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알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겉으로 보기에 아무 변화도 없는 우리의 모습은, 그누구와도 같다고 말할 수 없는, 매순간 성장하고 나아가는 의미 있는 기척인 것이다.
윤대성_댄스포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