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중앙 4월호] 배우 엄지원의 구김없는 마음
작성자 : TanzPlay(118.♡.233.54) 작성날짜 : 2016-03-29 15:02:25  |  조회수 : 489

배우 엄지원의

구김없는 마음


                                                                     여성중앙 4월호


 

 

엄지원은 잘 웃는다.

보는 사람까지도 기분 좋아지는 '백만불짜리 미소'다.

하지만 눈을 보면 실컷 울고 난 사람의 그것처럼 물기가 가득하다.

잘 울어봤기 때문에 잘 웃는 사람,

마음의 표류를 끝내고 중심에 닻을 내린 단단한 여자, 엄지원 이야기


                                                                                                        에디터 최혜진

                                                                            Photographed by HONG JANG HYUN




엄지원은 김수현 작가가 '얼굴에서 지(知)가 보인다'고 칭찬한 사람답게 대부분의 질문에 똑부러진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가 지속적으로 느낀 감정은 여린 떨림이었다.

나침반 바늘 끝에서 느껴지는 정도의 미세한 떨림이라고 해야 할까.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고 쉽게 바스라질것 같은 여린 내면을 가진 사람이 떨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고 있는 북쪽을 가리키려고 애쓰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생각을 단 한 번도 의심 해본 적 없이 덜컥 갖는 확신이 아리나

뾰족하게 의심하고 질문해봐서 정리될 수 있는 소신이 그녀 안에 있음을 느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역할들이 주어졌다.

그 와중에 여자 엄지원, 배우 엄지원을 인생의 중심에 놓기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는지

본인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며,

혼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누군가를 통해 행복을 성취하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을 고민해야 한다.

사실 그 작업은 결혼 전에 이미 끝낸것 같다.

배우 생활을 하면 극중 인물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초창기에는 일상의 엄지원으로 돌아왔을 때 굉장한 공허함과 혼돈을 느꼈다.

'진짜가 뭐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무엇이 엄지원의 생각이지?'

이런 질문이 쉼 없이 몰아치는 시기가 있었다.

내가 단단히 뿌리를 박지 않으면 이런 고민과 혼돈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 나의 가치관은 무엇, 나는 어떤사람,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봐야 하는 지점은 어디인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고,

결혼 전에 나라는 사람의 중심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게 잡혀있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났을 때

'아, 이사람은 나와 가치관이 비슷하니 서로 같은 방향을 보면서 걸어갈 수 있겠구나' 판단할 수 있었다.



여행은 불확실한 상황 안에 자신을 던져넣는 행위인데

그 일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한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불확실함의 결정체인걸 뭘(웃음).

사실 내일 당장 무슨 작품을 할지 모르고, 나에겐 직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도 없다.

언제 시나리오가 안 들어오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불확실한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라면 행복하기 힘든 직업이다.

사람마다 타고난 꼴들이 있는데 시간과 함께 어떤 부분은 특화되고 어떤 부분은 다듬어지곤 한다.

내 안에도 분명 시니컬하고 뾰족한 면이 있었지만 시간과 함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쪽으로 다듬어진 것 같다.



자신을 다듬어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무척 쉬운 것처럼 말한다

남을 바꾸는 것 보다 나를 바꾸는게 더 쉽다.

자신은 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으면서 남만 바꾸려고 하면 삶이 불행해진다.

'왜 굳이 불행을 택하나, 그냥 내 생각을 바꾸면 되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내 힘으로 남을 바꿀 순 없다.

내가 그나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내 생각이고 내 삶의 방향이다.

주변을 바꾸느니 나를 바꾸는게 낫다. 그게 제일 편한 길이다.



가지치기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더 명확히 알게 됐고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졌다.

Simple is the best.

심플해지고 있는 내가 좋다.

물론 10년쯤 뒤에는

젊은 날의 다채로움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가지치기가 끝에 알아낸 엄지원이라는 여자의 특징은

굉장히 복합적이고 알수 없는 사람이다.

흥도 많고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다.

화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말을 잘하는 스피커이기보다는 말을 잘 듣는 리스너이고, 오지랖이 넓다.

자는 걸 좋아하고 굉장히 게으른데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을 보내는 건 싫어 해서 결과적으로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여러모로 이중적인 여자다(웃음).



삐딱하게 보자고 마음 먹으면

"엄지원, 당신은 가진게 많으니까 행복을 주는 일들을 골라가며 살 수 있지"

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행복은 얼마나 소유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 아닐까.

신인 때 소속사 분쟁으로 전혀 활동을 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커리어 중반기에는 1년 동안 일이 아예 없던 시기도 있었고,

차마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가 없어서 가지고 있던 가방을 팔아서 생활을 했다.

소위 말해 바닥을 친 시기인데 그때도 나는 행복을 지키며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시선으로 볼 때 나는 많이 가진 사람일 것이다.

내 고민이 배부른 소리라 말한다 해도 나는 이해 할 수있다.



첼로, 일본어, 영어, 탄츠플레이, 가드닝 등 뭐가를 쉼 없이 배운다.

심지어 강아지를 잘 키우기 위해 반려견 행동 전문가의 수업까지 듣는다고

강아지, 마당 정원 가꾸기, 요리..

이런 일상의 작은 기쁨들이 내 마음에 생기를 더해준다.

집에 있는 나무 화분들은 내가 전부 과천화훼단지까기 가서 분갈이를 배워서 직접 가꾸고 있는 아이들이다.

또 허송세월하는걸 싫어한다.

배움은 나이와 상관없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배우면 스펀지처럼 더 받아들일 수 있을 꺼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가장 많이 흡수할 수 있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오늘의 나는 항상 내일의 나보다 젊으니까.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는 '요즘 나 뭐해'라고

말 할 거리가 없으면 부끄럽다.

생산적인 뭔가를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감도 강하고

맞다.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프로그래밍된 가치관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자꾸 떠나는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험도 해보고 싶어서.

그래도 감사 한 건 내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신경쓰기보다는

'나 스스로의 기준에 만족하는지'를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자기 검열이 굉장히 강한 편이다.



지금까지 한 연기 가운데 엄지원의 기준에 만족했던 작품은 무엇인가

한 번도 내 연기에 만족해본 적이 없다.

물론 매 작품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한 연기를 극장에서보면 뭔가 오글거리고 못마땅하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면 내 연기를 챙겨보지 않았다.

내가 다시 봤을 때도 마음에 드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

배우를 하면서 늘 그런 순간을 꿈꾸며 산다.

누군가의 인정을 기다리는 건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를 화려하게 받지 않아도 묵묵히 계속해가다가

어느 순간 내가 보기에도 잘했다 싶은 연기로 확 꽃을 피우는 순간.

그런 꿈을 꿀 수 있어서 그 길고 가는 과정이, 지금이 즐겁다.